올라 치니또 (Hola Chinito)
‘고된 노동’을 의미하는 쿨리( 苦力, coolie)는 19-20세기 초에 중국계, 인도계를 중심으로한 아시아 출신 노동 이민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반 인륜적인 흑인 노예 제도가 폐지된 후 구미 열강들의 많은 식민지들과 미국에서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에 영국은 노예를 대신하여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일에 종사할 단순 노동 인력을 필요로 했다. 식민지였던 인도 대륙에서 최하층 빈민들을 납치 혹은 회유하여 인생 막장같은 고역의 현장으로 송출했다. 또 아편 전쟁에서 승리한 후 광둥성, 복건성을 중심으로 샤먼, 마카오 등지에서 가난한 중국인들을 모집했고 세계 각지에 산재한 대영제국의 식민지들, 미국, 쿠바 등지로 보내 노예처럼 혹독한 노역을 감당케했다.
노예 상인들이 ‘바라꼰’ (Barracon, 흑인 노예 감옥)이란 모집 기관을 설치 한 후 부유한 무역상이 구인 광고하는 것 처럼 꾸민다.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던 중국인들을 ‘로스 꿀리스’ (Los Culis, 계약 노동자)’ 로 대우할 것 처럼 유혹한다. 흑인 노예와 쿨리의 다른 점은 노예 주인과 고용 계약서 작성 유무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명목상 꾸며진 노동 계약서는 흡사 노예 문서처럼 독소 조항이 가득차 있었다. 고용기간은 8년이고 고용주의 지시에 철저히 따라야 하며 농장, 탄광, 부두 건설, 대륙 횡단 철로 건설 등에 투입되어 목숨이 끊어지기 전 까지 노역에 투입되어야 했다. 게으름을 피거나, 반란, 도주할시 체벌이 따랐고 중도에 계약 해지를 할 수 없었던 악법이 었다.
감언이설에 속은 10만명의 쿨리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했고 미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 건설 노동자로 투입됐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82km의 파나마 운하가 1914년 완공되었을 당시 운하 건설에 투입됐던 노동자 중 말라리아, 황열병, 사고로 사망한 27500명 대부분이 쿨리였다. 1847년-1870년까지 쿠바로 송출된 쿨리는 143000명 이었으나 6개월여 항해 끝에 17000명이 부족한 식량, 열악한 환경탓에 배에서 죽었고 바다에 던져졌다. 그나마 목숨을 부지한 쿨리는 아바나에 도착 즉시 나체로 경매장에 전시되었다. 고용주에 팔린 후 족쇄에 묶여져 노동 현장으로 직행한 저들의 75%가 계약 기간 8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었고, 평균 노동 수명은 5년에 불과했다. 탈출을 시도했거나 반란을 일으킨 쿨리에겐 일벌백계의 참혹한 형벌로 다스렸다 . 멕시코 바하 캘리포니아로 건너간 쿨리들은 1910년 멕시코 혁명당시 역도로 매도되어 억울한 죽임을 당해야 했다.
슬프고 고달펐던 쿨리의 세대가 다 지난 후 그 후예들이 중남미 곳곳에 흩어져 살고있다. 그 땅의 언어를 모국어처럼 말하고 현지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뤘으며 근면 성실한 성품으로 나름대로 성공적인 정착을 한 중국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남아있다. 행색이 초라하면 ‘치노’(중국인) , ‘치니또’로 낮춰 부르고, 단아하면 ‘하뽀네사’(일본인) 냐고 반색한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 2의 경제 국가로 부상한 치노를 여전히 무시하는 저들의 어리석음의 도가 지나치다. 굿스푼이 정성껏 건내는 점심 도시락을 받으며 올라 치니또(Hola Chinito) 무례한 인사로 답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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